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여담 == 교전 지역이 동해안 일대와 강원도 및 경상북도 태백산맥 일대로 광범위한 편이다. 언론에서는 보도통제로 구체적인 지명은 나오지 않으나, 양양[* 共匪(공비) 총 백10名(명)소탕 4名(명)더사살, 1968-12-23, 매일경제], 평창(이승복 사건), 영주, 인제[* 모두 79명 소탕, 1968-12-15, 조선일보] 등에서 일어났으며, 을종사태 포고 지역도 울진, 영양, 봉화 등을 포함해 매우 넓었던 것을 감안하면 교전 지역이 거의 수십 km에 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7~8월에 100명, 9월에는 300여 명의 북한군이 교전 중 전사했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로 긴장이 심한 한해였다.[* 올 들어 삼백여명, 1968-10-26, 동아일보][* 그 때 당시 [[군사분계선|휴전선]]에서는 미군-국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국지전이 틈만나면 벌어졌다.] 허사도[* 예비군 무장, 1968-12-23, 경향일보], 서산[* 공비 11명 사살, 1968-11-04, 경향신문] 등 다른 지역에서도 산발적 교전이 있었다. 1.21 사태 이후로 신설된 예비군[* 예비군 무장, 1968-12-23, 경향일보] 및 전투경찰대[* 목숨걸고 내 고장 지켜 다시 찾은 平和(평화), 1968-12-26, 조선일보]도 투입되었으며, 특히 전투경찰대는 파월장병출신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침투 시기가 늦어, 지원이 거의 없던 무장공비에게는 [[태백산맥]]의 겨울도 반갑지 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특히 투입된지 얼마 안된 시점에 갑작스레 추위가 찾아와, 11월 10일에 서울이 영하 9도로 떨어져 동사자가 발생하고, 작전지역에서도 100cm 이상의 눈이 쌓이는 상황이었다. [[https://www.weather.go.kr/w/obs-climate/land/past-obs/obs-by-day.do?stn108&x=20&y=13&yy=1968&mm=11&obs=1|#]] 침투 1달 뒤인 12월 7일에는 투항자가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문책도 있었는데, 경계 자체를 포기한 문무림, 김복수 일병은 사형, 책임자인 소대장 둘은 각각 징역 10년과 15년, 중대장 둘은 각각 7년과 10년, 대대장 둘은 각각 2년과 3년씩 선고받았다. 허위보고를 한 김남출 하사는 3년, 같이 술을 마신 병사들은 각각 2년씩 선고받았다. 다만 분위기가 좀 가라앉고 항소심에서는 형량이 크게 줄어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병사들은 무죄를 받았고, 문무림과 김복수 또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다만 당시 군법재판도 처벌수위는 민간법과 차이가 없어서 동료 혹은 민간인을 살해한 살인사건이 아니면 사형을 가능한 내리지 않는 분위기이긴 했다.] 지금은 모두 출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한 공비들은 '적군'이 아니라 '행려사망자'로 분류되어 사망한 면사무소에서 자체적으로 매장했다. 이승복이 사망한 평창군 진부면의 경우 12명의 공비가 사살되었는데 해당 면사무소에서 12구의 시신을 매장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